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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김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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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빈 (121.♡.204.190)
댓글 1건 조회 64,601회 작성일 21-01-12 13:39
간략소개 내가 광산김가라 유튜브를 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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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항렬 돌림표.


광주광역시 광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로 시조는 김알지()의 후손인 신라 신무왕()의 아들 흥광공이다. 

신라 신무왕의 셋째아들 김흥광()을 시조로 하는 광산김씨()는 한국의 대표적인 가문의 하나로서 '광김'으로 일컫는다. 이 가문은 조선시대에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본관별 서열로 제5위가 되었다. 여기에서 정승이 5명, 대제학이 7명, 청백리가 4명, 왕비가 1명이 나왔는데, 특히 대제학 7명은 ‘광김’을 더욱 빛나게 한 사계() 김장생()의 자손이다.

광산김씨는 고려 초기 삼중대광()에 오른 3세손 김길()로부터 8대에 걸쳐 평장사()를 배출하여 명문 가문의 기반을 이루었으며, 15세손으로 대광()에 오른 김정()의 아들인 약채()·약항()·약시() 3형제대에서 더욱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김장생()은 예학()의 태두로서 그의 학문은 이조판서를 지낸 아들 집()에게 계승되어 부자가 문묘()에 배향()되는 전무후무한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집의 아우 반()의 여섯 아들은 모두 출중하고, 후손이 크게 번창하여 ‘광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영의정 김상복(), 우의정 김희(), 이조판서 김상휴()·기만()·기은(), 대제학 김만기()·만중() 형제 등이 모두 이들의 후손이다. 이 가운데 총융사(使)를 지낸 만기와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작가로 유명한 김만중의 후손 중에서 많은 인물이 나와 ‘사계 자손’의 주축을 이루었다.

예조판서·대제학을 지낸 김진규()는 김만기의 아들이며, 대제학·영의정을 지낸 김양택()은 김진규의 아들로서 3대 대제학, 형제 대제학의 진귀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시문집 10권을 남긴 문인 김춘택(), 고종 때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낸 김영수()는 김진규의 형이며, 판서·참찬을 지낸 김진구()의 후손이다. 조선시대 총 265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했고 정승이 5명, 대제학이 7명, 청백리가 4명, 왕비가 1명이다.


1) 원시조: 범신라계 김씨(시조 김알지- 광산,의성,경주김씨등)


2) 광산 김씨 시조 :신라 제45대 신무왕의 세째 아들 김 흥광


3) 광산 김씨 인구수: 전국 93만명 예상(추정, 해외동포 포함)


4) 한국의 대표적인 가문(일명 광김)


- 정승 5명/대제학 7명/ 청백리 4명


- 왕비 1명(숙종 제1왕비 인경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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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표적 인물


- 조선시대: 김국광(좌의정), 김장생(예학의 태두), 김 집


김만중(구운몽),김천택(청구영언),김춘택(문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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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추기경), 김우중(전 대우그룹), 김황식(전 국무총리)


김현미(국토부), 김용태(국회의원),김현아(국회의원),김장수(전 국방부장관)


김용옥(도올,학자),김춘수(시인),김희중(대주교) 김대중(언론인),김태호(PD),김덕수(사물놀이)



- 연 예 인:  유이


김용건,김용만,김성환,장항선(김봉수),김응수,김병조,김영삼(개그맨,치과의사)


김상중(그것이 알고 싶다),김수로,하정우(김성훈),김명민(불멸의 이순신)


김C(김대원),현빈(김태평),김갑수,김범수(아나운서),김정민(가수),


김일중(아나운서),김우빈,기태영(김용우,유진의 남편),소향(김소향)


김용임(가수),김현숙(개그우먼),김아중(배우),김성희,정선경(김선경),김용림,


김혜영(싱글벙글쇼)김경애,김영옥,이지아(김지아),김영애, 솔라(김용선),


김가연(임요환의 아내),유진(김유진,SES),예원(김예원)


김석진,김태형(진,뷔,방탄소년단),김승현(살림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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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문은 충청도에 적을 두고 있다가 아버님이 군인으로 부산에 자리를 잡게되어 현재 거주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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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신(文臣) 의정공(議政公) 김국광(金國光, 1415~1480)은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김철산(金鐵山)의 4아들(김국광, 

김겸광, 김정광, 김경광) 중 장남으로 , 호는 서석(瑞石)이며 1441년(세종23)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를 거쳐 지평(持平),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 등을 역임하였고, 1460년(세조6) 북방 오랑캐가 침입하자 함경도 

경차관(咸鏡道敬差官)으로 나아가 적을 회유하여 공을 세워 병조 참판, 병조 판서에 이르렀고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남이 장군과 함께 평정하였으며, 세조의 명으로 최항(崔恒), 노사신(盧思愼) 등과 '경국대전

(經國大典)' 편찬에 착수하여 성종 때 반포케 하였고, 병조참판(兵曹參判), 1466년 4월에 병조판서(兵曹判書)를 1467년 4월 

우참찬(右參贊) 겸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1469년 세조가 사망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맡았으나, 그 해 10월에 겸 병조판서에서 해임되고 좌찬성으로서 국정에 참여했고 이듬해 5월 충청도와 

전라도의 문폐사(問弊使)로 내려가 여러 가지 폐정 시정에 노력했으며, 8월에는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습니다.

1470년(성종1) 4월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며 5월에는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훈 되고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8월에 아우 김정광(金廷光)과 사위 이한(李?)의 부정 사건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원상과 영경연사(領經筵事)만을 겸하다가 1481년(성종 12)에 병이 들어 죽자 왕이 장례를 

정중히 치르도록 어명을 내리고 장례 비용까지 하사하였다 합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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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빈님의 댓글

사빈 아이피 (121.♡.204.190) 작성일

세조로부터 ‘사지제일(事知第一)’의 4자를 직접 써서 하사받은 의정공 김국광의 시호는 정정(丁靖)이며 묘소는 충청남도 계룡시(鷄龍市) 두마면(豆磨面) 왕대리(旺垈里) 임좌 언덕 계룡 IC 앞에 있고, 그의 부인 정경부인 황씨 묘소는 의정공 묘소 바로 뒤에 있습니다.

김국광은 영의정 황희(黃喜)의 손녀이자 증한성부(贈漢城府) 소윤(少尹) 황보신(黃保身)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슬하에 극뉵(克?)과 한성좌윤공파(漢城左尹公派)의 파조인 극니(克?), 경력공파(經歷公派)의 파조인 극수(克羞), 수사공파(水使公派)의 파조인 극괴(克愧), 강화경력공파(江華經歷公派)의 파조인 극침(克?)의 5남과 사위로 이한(李?)과 이혜(李?), 송여림(宋汝霖)이 있었습니다.

사계 장생의 5대 조이기도 한 그는 조선 초기의 문 신으로 자가 관경(觀卿)으로 감찰공 철산의 네 아들 중 장남 김국광은 광산 가문의 첫 정승에 올랐고, 높은 벼슬을 하면서도 평생 근신하며 소박하게 살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광산 김씨의 자랑스러운 인물이랍니다.

의정공 김국광은 영의정 익성공(翼成公) 황희의 아들인 증한성부 소윤 황보신의 사위인데 그가 세종 때인 1438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유생으로 뽑혔을 때, 황희 정승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김생은 “작게 될 사람이 아니다.”하며 공경하고 중히 여겨 반드시 의관을 정제한 후에야 그를 만났다 하며 그러던 황희 정승이 어느 날 김국광을 손녀사위로 삼고자 하여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작심하고 “국광이라는 유생을 손녀사위로 삼고자 하는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하냐?"라고 물었는데 황정승의 며느리가 “아버님! 그 사람됨이 그다지 출중하지 못하니 그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라며 반대를 하자 며느리를 따로 불러 “사람을 택할 때 그 사람의 장래성을 보아야지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라.”라고 타이르고는 국광을 그의 손녀사위로 삼았다고 전합니다.

그러한 의정공에게는 세 명의 아우가 있었는데 둘째가 공안공 겸광(謙光)이고, 셋째가 첨정공 정광(廷光)이며, 넷째가 판교공 경광(景光)으로 그가 좌의정으로 있을 때 셋째 정광은 제용감 첨정(濟用監 僉正) 벼슬을 하고 있을 때 국가의 물품을 수납하는 기관인 제용감에 첨정공이 첨정으로 있으며 막대한 국고 손실을 입히는 수뢰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를 지었고, 그때 그의 사위인 직산 현감 이한(李?) 역시 같은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받았지만 정광은 사형에 이를 중죄를 지었음에도 나라에서는 의정공의 아우라는 명분으로 첨정공을 사형시키지 않고 중국으로 추방하였다고 하며 의정공은 이 일로 가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죄책감에 늘 근신하고 살면서 스스로에게 주어지는 시호도 사양한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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