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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taph - King Crim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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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빈
댓글 0건 조회 92,721회 작성일 20-03-05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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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소개: 신비롭고도 환상적인 음악을 창조해내는 영국 출신의 그룹 킹 크림슨(King Crimson)은 1969년 1월 조직되어 4월에 데뷔했다. 연말에 발표한 데뷔 앨범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은 영국에서 그룹 Beatles의 「Abby Road」를 누르고 톱을 차지했다.
가사 해석
The wall on which the prophets wrote is cracking at the seams
Upon the instruments of death the sunlight brightly gleams
When every man is torn apart with nightmares and with dreams,
Will no one lay the laurel wreath as silence drowns the screams

Between the iron gates of fate, the seeds of time were sown
And watered by the deeds of those who know and who are known;
Knowledge is a deadly friend when no one sets the rules
The fate of all mankind I see is in the hands of fools

Confusion will be my epitaph
As I crawl a cracked and broken path
If we make it we can all sit back and laugh
But I fear tomorrow I'll be crying
But I fear tomorrow I'll be crying

마이클 자일스(Micheal Giles, 드럼·보컬), 피터 자일스(Peter Giles, 베이스·보컬),
그리고 로버트 프립이 1967년 말에 결성한 '자일스 자일스 앤 프립(Giles, Giles & Fripp)'이라는
이름의 트리오는 1968년에 첫 싱글 'One in a Million'을 발표하면서
데뷔한 뒤 같은 해에 데뷔 앨범 'The Cheerful Instanity of Giles, Giles & Fripp'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트리오의 앨범은 판매 부진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그에 따른 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해체 수순을 밟아야 했다.
  하지만 로버트 프립은 밴드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969년 초에 자일스 자일스 앤 프립에서 함께 활동했던
 마이클 자일스를 포함하여 이언 맥도널드와 그렉 레이크를 영입하여
새로운 밴드 체제를 구성하고 객원 작사가인 피터 신필드와
함께 불멸의 밴드 '킹 크림슨'을 결성하여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나가게 된다.
  4인조 밴드인 킹 크림슨은
밴드 결성 후 연습 기간을 거쳐 1969년에 데뷔 음반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을 발표하였는데
이 음반은 프로그레시브 록 역사상 가장 탁월한 음반으로
 분류되며 팬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또한 타이틀 곡인 'The Court of Crimson King'은
 평론가들의 찬사를 이끌어 내면서 프로그레시브 록에 있어서
 가장 혁신적인 곡으로 평가 받게 된다.
동시에 이 곡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으며 영국 싱글 차트에서 5위에 올랐고
미국의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는 28위를 차지하는 히트를 기록하였다.

예언자들이 쓴 벽의 틈이 갈라지고 있어
죽음의 악기 위로 햇빛이 밝고 희미하게 빛나
모든 사람이 꿈과 악몽으로 갈가리 찢길 때
침묵이 비명을 잠식하듯 누구도 월계관을 쓰지 못할 거야

운명의 철문 사이로 시간의 씨앗이 뿌려지고
아는 사람과 알려진 사람들의 행위로 인해 물이 주어졌지
아무도 법을 지키지 않으면 지식은 무서운 친구
내가 아는 인류의 운명은 바보들의 손에 달렸어

내 묘비명은 혼란
내가 갈라지고 부서진 길을 기어가듯이
우리가 성공하면 허리 펴고 물러 앉아 웃을 수 있어
하지만 내일이 두려워 난 울고 있을 거야
하지만 내일이 두려워 난 울고 있을 거야

우리나라에서는 프로그레시브 록 팬 뿐만 아니라
 팝 음악을 즐겨 듣는 팝 팬들 대부분에게 알려진 명곡 'Epitaph'가
수록된 이 음반으로 프로그레시브 록 역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긴
 킹 크림슨은 데뷔 음반 발표 후 미국으로 순회 공연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미국 순회 공연을 마친 후 밴드는 분열의 양상을 띠게 되는데
첫 시작은 이언 맥도널드와 마이클 자일스의 탈퇴에서 비롯되었다.
 지속되는 공연에 따른 스트레스와 밴드의
음악적 방향에 대한 불만으로 두 사람은 킹 크림슨을 탈퇴했고
 그렉 레이크 또한 두번째 음반 'In the Wake of Poseidon(1970)'을 끝으로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Lake & Palmer)'를
 결성하기 위해 킹 크림슨을 떠나게 된다.
이후 킹 크림슨은 로버트 프립을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 나가게 된다.
 1969년에 발표된 킹 크림슨의 데뷔 음반은
본격적인 최초의 프로그레시브 록 음반이라 봐도 손색이 없는
 역사적인 음반으로 객원 작사가로 참가한 피트 신필드가
쓴 서정적이며 스케일이 큰 서사시에 멜로트론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첨가해 두고 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명반으로 남게 된다.
  사이키델릭 음악에서 추구했던
 음의 시각화와 즉흥성을 교향곡의 장대함과 결합시킨
 킹 크림슨의 데뷔 음반은 이전에는 결코 찾아 볼 수 없었던
충격적인 사운드를 담고 팬들에게 다가 왔는데
이 음반은 우리나라의 팝음악 애청가라면 한번씩은 다 들어 봤을
명곡 'Epitaph'로 인해 더 빛이 나는 음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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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롭고도 환상적인 음악을 창조해내는 영국 출신의 그룹 킹 크림슨(King Crimson)은 1969년 1월 조직되어 4월에 데뷔했다. 연말에 발표한 

데뷔 앨범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은 영국에서 그룹 Beatles의 「Abby Road」를 누르고 톱을 차지했다. 

당시의 멤버는 Robert Fripp(기타), 마이클 자이즈(드럼), Ian McDonald(엘토 색소, 플륫, 클라리넷, 멜로트론), Greg Lake(베이스, 리드보컬), 

Peter Sinpfield(작사, 조명) 등이었다.

그러나 1970년 1월에 마이클 사일즈와 이언 맥도날드가 이 그룹을 떠나 새로운 그룹을 만들자, 그 후부터 로버트 후립과 피터 신필드 두 사람이 

곡을 써 두 번째 앨범 「In the Wake of Poseidon」을 발표했다. 이때 데뷔 앨범에서 베이스기타를 담당했었던 그레그 레이크는 보컬만을 맡았고 

베이스는 킹 크림슨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자일즈, 샤일즈 & 후립의 멤버였던 피터 자일즈가 맡았다. 그리고 색소폰주자 Mel Collins와 

베이스주자 Gordon Haskell, 그리고 재즈 피아니스트 케이스 티페트가 참가했다.

두 번째 앨범이 발표될 무렵 그레그 레이크는 Keith Emerson과 트리오를 만들기 위해 탈퇴하였다. 그러나 로버트 후립은 유능한 새 멤버를 

물색하여 다음 앨범을 제작, 1970년 12월, 세 번째 앨범 「Lizard」를 발표하였다. 이 앨범의 모든 곡을 로버트 후립과 피터 신필드가 만들었고 

프로듀서도 겸했다. 다른 멤버로는 플륫과 색소폰에 멜 콜린즈, 베이스기타와 보컬에 고든 하스켈이. 드러머에는 샌터 크랩뉴먼 출신의 

Andy McCulloch 였고 게스트로는 오보에 주자 로빈 밀러, 코넷에 마크 챠릭, 트럼본에 닉 에반스, 피아노와 일렉트릭 피아노에 케이스 디페트와 

같은 영국 재즈계의 중견들이 얼굴을 나타냈고 또 애수의 보컬리스트 John Anderson이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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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멤버에 변화가 있어 드럼에 아이언 윌리스, 베이스에 실스로 바뀌었다. 1971년 5월부터는 69년 데뷔 공연 이후 중지되었던 스테이지 활동을 

전개하는 등 맹활약을 했으나 72년 작사와 조명을 맡았던 피트 신피드가 로버트 후립과의 의견 충돌로 인하여 그룹을 탈퇴, 아쉬움을 가진채 

킹 크림슨은 해산되었다. 그러나 73년 로버트 후립을 선두로 새 킹 크림슨이 조직되면서 앨범 「Island」와 「Lark's Tongue In Aspic」을 

발표하여 더욱 완숙한 음악을 들려주었으며, 이 앨범은 70년대 전반에 걸쳐 브리티쉬 프로그레시브록의 나아갈 바를 제시해 주었고 

그룹 자체로서는 Yes나 EL & P 또 Genesis 등 수많은 그룹에 활로를 열어 주었다.

그의 음악이나 마찬가지로 후립의 성격 또한 격렬한데다가 선동적인 기질이 다분히 엿보이는데 그룹활동 6년 동안 쉴 새 없이 멤버가 교체되었고,

 결국 75년 완전히 그룹을 해산하고 후립은 잉글랜드 셔어본 지방에 있는 농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공백기간동안 후립은 친우이자 

신세사이저의 마술사인 Brian Eno와 함께 앨범 「No Pussyfooting」과 「Evening Star」 등 두 장의 일렉트릭 사운드 앨범을 레코딩하였으며,

 77년 Davie Bowie의 앨범 「Heroes」에 참가하기 전까지 록계에 복귀했다고 볼 순 없었다.

그 앨범에서 벌인 기타세션이 계기가 되어 그는 다시금 프로뮤직의 세계로 뛰어들게 되어 그 해 말 Daryl Hall과 그룹 The Roches의 앨범을 

프로듀스하는 등 폭넓은 활동을 벌였다. 78년 후립은 테이프 음향 녹음과 라이브 기타사운드를 혼합 발전시킨 스타일의 Frippertronics라는 

새로운 음악의 장을 열어, 이 이론에 입각한 앨범 「God Save The Queen / Under Heavy Manner」를 내놓으면서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확고한 

신망을 얻었으며, Polidol 레코드사에서 솔로 앨범 「Exposure」 등을 발매하였다. 그리고 80년 그룹 League of Gentleman의 이름으로 발매한 

앨범 「League of Gentleman」은 오리지널 크림슨이 해산한 후 그가 걸어온 과정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앨범이었다. 그러나 로버트 후립은 

1981년에 일부 멤버를 교체하고서 4명의 새로운 킹 크림슨을 만들어 앨범 「Disciplin」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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