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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빈
댓글 0건 조회 58,540회 작성일 17-09-24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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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소개: ROCK
가사 해석
속주기타의 제왕이라 불리우던...
   

바로크 메탈의 제왕이라는 별명은 잉베이 맘스틴에게 붙여진 가장 적절한 칭호이며

그의 기타와 음악을 가장 잘 정의하는 수식어이다.

그가 기타 연주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헤비메탈 기타 연주에 클래시컬한 요소들을 적극

도입했다는 점인데, 그것은 아마도 클래식에 정통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클래식 기타를 배웠던 가정 환경과 클래식적 요소가 강했던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비발디, 바흐 등 바로크 시대 음악가들의 대위법 선율을 록 기타 연주에 응용했고

파가니니의 초절기교의 바이올린 테크닉 또한 기타 연주를 위해 옮겨 왔다.

한 개의 줄 위에서 7~8잇단음 이상이 이어지는 긴 프레이즈를 빠르게 연주하는 스타일이

대표적으로 바이올린 주법을 활용한 것이다.


잉베이 맘스틴의 탁월함은 역시 눈부신 속주에 있다. 속주를 위해 고안했다는 스윕 피킹 주법은

그의 트레이드마크 가운데 하나인데, 왼손가락의 현란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한 스윕 피킹은

업다운 크로스 피킹 만으로는 한계에 봉착해 있던 속도 경쟁에 새로운 신기원을 열었다.

솔로 애드립에서 보여주는 유연한 스케일의 연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강점이다.

그는 내추럴 마이너, 하모닉 마이너, 디미니쉬 스케일 등 다양한 스케일을 적극 활용해 독창적인

연주를 펼침으로써 펜타토닉 스케일에 갇혀있던 기존의 연주 패턴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잉베이 맘스틴은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와 마샬 앰프라는 고전적 조합을 즐겨 사용했다.

알카트라즈 시절 이후 그는 평생을 초지일관 이 조합을 고집했는데

그래서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의 마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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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NGWIE MALMSTEEN 은 1960년 6월30일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태어났다. 3살때 피아노를 배웠고,

5살때 클래식 기타를 7살때 지미 핸드릭스가 타계한 1970년 9월18일 그의 TV특집을 보고

그를 영적 우상으로 삼고 피나는 기타독학을 시작했다고 한다.

지미 핸드릭스를 영웅으로 리치 블랙모어의 기타테크닉을 교과서로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연습을 하였다.

 10대에 접어들면서 그는 아마츄어밴드들을 결성하고 1978년 Rising Force라는 그룹을 조직하게 되는데... 

그럼 좀더 자세히 그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보도록 하자..


지미 헨드릭스 이후 가장 혁신적인 기타리스트로 추앙받으며 1980년대 초반의 헤비메탈 씬을

사실상 평정했던 에드워드 반 헤일런 앞에 강력한 도전자가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잉베이 맘스틴, 이른바 바로크 메탈의 전성기를 열어젖히며 1980년대 중반 이후 불꽃처럼

펼쳐졌던 기타계의 속주경쟁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어느 날 리치 블랙모어가 우연히 그의 음반을 듣고는 누군가 레코드를 고속으로 돌리고 있는 줄

착각했으나 그것이 실제 연주 속도임을 알고 이제 자신의 시대는 갔다며 탄식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잉베이 맘스틴의 연주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를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몇몇 로컬 밴드를 거쳐 1978년 라이징 포스(Rising Force)를 결성한 그는 기타 전문잡지 「기타 플레이어」에 

데모 테이프를 보냈는데, 그것을 들은 저명한 칼럼니스트 마이크 바니(Mike Varney)가 「기타 플레이어」의 '

스포트라이트' 칼럼에 그를 소개함으로써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마이크 바니의 주선으로 그룹 스틸러(Steeler)에 

가담해 미국 록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그는 1983년 그래험 보냇과 함께 알카트라즈(Alcatrazz)를 결성했다.




잉베이 맘스틴은 알카트라즈 시절 데뷔 앨범인 「No Parole from Rock 'n' Roll」과 일본 공연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 「Live Sentence」 단 두 장의 앨범에 참여했다.

「No Parole from Rock 'n' Roll」에서는 수록곡 〈Island in The Sun〉 〈Jet to Jet〉

〈Hiroshima Mon Amor〉 등에서 탁월한 기타 솔로를 들려주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Live Sentence」 실황에서는 바흐의 유명한 클래식 명곡인 〈부레〉를 일렉트릭 기타로 편곡해

연주한 〈Coming Bach〉의 연주 장면이 향후 그가 걸어갈 길을 예시한 명장면으로 꼽힌다.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이미 기타의 신성으로 떠오른 잉베이 맘스틴은 그러나 열 살에서 스무 살에 이르는

  다른 멤버들과의 현격한 나이차와 음악적 견해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알카트라즈를 떠나

자신의 밴드인 라이징 포스를 이끌고 독자적인 활동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Rising Force」는 1984년에 나왔는데, 이 앨범은 헤비메탈 기타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기념비적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에 〈Black Star〉 〈Evil Eye〉 〈Far Beyond The Sun〉 등 그의 대표곡들이 대거

수록되어 있는데, 바로크 메탈의 전성기는 명백히 이 앨범과 함께 도래했다고 할 수 있다.


「Rising Force」는 「기타 플레이어」에 의해 그 해 베스트 록 앨범으로 선정되었으며

 그래미 어워즈의 베스트 록 연주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Rising Force」가 잉베이 맘스틴의 기타 플레이를 전면에 내세웠던 반면, 이어진 앨범들인

「Marching Out」(1985)과 「Trilogy」(1986)에서는 대중성을 고려해서 보컬의 비중을 높이게 되는데,

 이러한 전략은 성공을 거두어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1987년 잉베이 맘스틴은 큰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손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업친데 덥친 격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상실감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그는 1988년 아픔을 이기고 돌아와 컴백작인 「Odyssey」를 발표했다.

수록곡 가운데 〈Heaven Tonight〉이 크게 히트했으며 앨범도 최대의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서

잉베이 맘스틴은 재기에 성공했다.


잉베이 맘스틴이 한창 기타계에 큰 파장을 일으킬때 "잉베이 같이 빨리 치는 것이 기타를 잘치고

못치는 것의 기준"이라는 그릇되고 애매한 패러다임을 본의 아니게 조성시켜 자기 색깔없는

수많은 아류기타리스트들을 낳기도 했고 자신들만의 고유의 연주를 과감히 버린 채

잉베이풍의 스타일로 돌변한 후 다시 자기의 색깔로 돌아오는데 많은 노력과 고생을 했던 연주자들까지

만들었을만큼 , 억울하겠지만 부정적인 부분도 분명히 존재했었다.

따라서 그러한 분위기에 반기를 든 수많은 기타리스트들이 탄생되었고 그 중 잉베이 못지 않은 걸출한

인물들의 출현도 눈에 띄지만 컬럼버스의 달걀 원칙과 같이 결국 누가 처음에 시도 하느냐가

중요한 관점으로 볼 때 잉베이의 그런 위치 하나만큼은 결국 그 누구도 대신 할 수 없을 자리임에는

틀림없다 하겠다.

 

기타역사의 한 장을 새롭게 만들고, 락음악을 클래식음악과 같이 학구적이고 고급스럽게 보여질 수

있도록 지대한 공헌을 한 잉베이 맘스틴의 역사가 시작된지도 벌써 수십년이 지난 듯하다.

 

그 긴 시간동안 락음악계에는 얼마나 수많은 사건들이 생겼었고 변화가 있었는지 굳이 얘기를 안해도

충분할만큼 잉베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기타를 들고 하늘에서 떨어진 아폴로같은 존재에서부터 독선과 아집으로 가득찬 못된 스쿠루지 같은

모습까지... 음악인으로서, 인간 그 자신으로서의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때 기타를 연주하는 연주인들에게 있어서 잉위는 신앙과도 같은 존재였고,대 혁명가였다.

이렇듯 잉베이의 과거 역사야말로 찬란한 한편의 영화같지만 언제부터인지 그가 행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발언들, 그리고 커다랗게 변화없는 음악들은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진게 아닐까 하는

불안함마저 팬들에게 같이 들려주고 있고 끊임없는 독설로 다른 수많은 뮤지션들을 완벽한 자기자신의

기준에서 잣대질을 한채 비난을 하며 "나 아니면 안된다"’라는 식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의 기준점을

자기로 만든 듯 살아가는 그에 대해 이미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전설 같은 존재로서만 그를 기억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길 바란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지만 만약 잉베이가 90년에 발매된 「Eclipse」를 끝으로

불의의 사고를 당해 유명을 달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지미헨드릭스 이후 또하나의

거성으로 자리잡아 최근같이 다들 그를 관심 밖 인물로 돌려놓기보다는 말 그대로 신성시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가 기타 다른 훌륭한 뮤지션들 같은 겸손함을 가지고 있다면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지만) 적어도 지금과 같이 욕먹지는 않을텐데....


하지만 어쨌건 음악인은 음악으로만 말해야 한다고 하듯이 그가 초창기 전성시절 라이징 포스라는

이름 아래 내놓았던 수많은 명반들과 개인 이름으로 내놓았던 다른 명반들의 업적은 분명한 것이다.

또한 끊임없는 투지와 열정으로 은퇴하지 않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계속적인 음악활동을 하는 것과

하드웨어에 대한 박식함은 분명히 박수를 쳐줄 만하다.

국내외를 불문하고 그에게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은 락 기타연주자가 과연 얼마나 될지 모를

정도로 커다란 영향력 덩어리 그 자체이던 잉위는 그의 마지막 스튜디오버전 음반인

「Facing The Animal」(97)이후 2년만에, 그리고 라이징 포스라는 이름 아래 발매된 마지막

음반인 「Odyssey」(88) 이후 11년 만에「Alchemy」라는 이름으로 99년을 장식했다.


전작 「Facing The Animal」에서 베이스를 쳐주던 배리 더나웨이(Barry Dunaway)는 이 음반에서도

 마찬가지로 연주를 하고 있으며 드러머로는 존매칼러소(John Macaluso)가 새롭게 영입되었다.

매번 신작이 나올때마다 나오는 말이긴 하지만 역대 보컬리스트들중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하는

 마크 볼즈(Mark Boals)를 맞이하여 과거 화려하던 라이징 포스 시절의 영화를 다시노리고 있다

언제나 잉베이와 그외 여러 기타리스트들에 대해 누가 더 잘났나는 식의 의견이 분분한게 사실이다..

적어도 훌륭한 아티스트란 독선보다는 융합혹은 전체적인 분위기에 흡수될줄도 아는 겸손한 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1999년 앨범홍보차 내한한 잉베이 맘스틴의 모습은 배가 나오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아저씨의

모습으로 전성기 때의 외모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어서 그의 멋진 모습을 기대했던 팬들에게는

많은 실망이 되었으리라....., 

잉베이 맘스틴 내한공연이 2015년 11월 10일(화), 11일(수), 양일간 현대카드 Understage에서

펼쳐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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