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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ors - Riders On The St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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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빈 (61.♡.249.82)
댓글 0건 조회 70,182회 작성일 17-08-31 06:40
 
간략소개

      아티스트                                               The Doors

      발 매1967
      프로듀서 Paul A. Rothchild
      작곡가

John Densmore, Robert Krieger, Ray Manzarek,

Jim Morrison

      레이블 Elektra
      앨범 The Doors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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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걸쳐 잇달아 히트 곡을 냈으며, 록 음악의 신화적 존재인

모리슨(본명 James Douglas Morrison)으로 유명하다.

그룹 멤버로는 짐 모리슨(1943년 12월 8일 미국 플로리다 주 멜버른에서 태어나 1971년 7월 3일 프랑스 파리에서 죽음), 

레이 맨자렉(1935년 2월 12일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남),

로비 크리거(1946년 1월 8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남),

존 덴스모어(1945년 12월 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남)이다.

도어스의 연주는 레이 맨자렉이 키보드, 로비 크리거가 기타, 존 덴스모어가 드럼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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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클래식 음악과 블루스를 결합하고 거기에 즉흥적인 재즈 연주를 가미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 4인조 밴드를 1960년대 당시 웨스트 코스트 록(West Coast Rock)으로 유명한 히피 유토피아의 조류와 

구분짓게 한 것은 짐 모리슨의 서정적이면서도 어둡고 외설적인 노래였다.

짐 모리슨이 일찍 죽자, 전형적인 록 가수이자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예술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더욱 확고해졌다.

모리슨과 맨자렉은 같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교(UCLA)의 영화학교 출신으로,

캘리포니아의 한 해변에서 모리슨이 맨자렉에게 자신의 시를 낭송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밴드를 구성하게 되었다. 모리슨은 그룹의 이름을 환각제 복용 경험을 다룬 [헉슬리]의 작품

〈인식의 문 The Doors of Perception〉(1954)에서 따왔는데, 헉슬리 또한 이 구절을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서 인용했다.


도어스는 로스앤젤레스의 선셋 대로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여기서 이들은 가사와 곡 모두 록의 경계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으며 유명해졌다.

도어스를 정상의 반열에 오르게 한 곡은 1967년에 발표한 [Light My Fire]였다. 그러나 잠재력 있고 연극적 재능이 있지만 

한편으로 논란이 많은 그룹이라는 명성을 안겨 준 곡은 〈종말 :The End〉이었다. [The End]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소재로 

성을 솔직히 표현한 가사에 혼란스럽고 변동이 심한 리듬을 가미한 11분짜리 곡이다.

실제로 로스앤젤레스 위스키 에이 고 고에서 [The End] 부른 후 도어스의 공연이 금지되기도 했다.

도어스가 추구했던 음악은 시카고 블루스에서 독일 카바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지만,

일부 비평가들은 인기를 모은 도어스의 곡들이 10대 취향만을 쫓는다며 비판했다.

진지한 예술가로 인정받기를 원했던 모리슨은 이 때문에 많이 고민했다.


도어스의 3번째 앨범인 〈태양을 기다리며 Waiting for the Sun〉 (1968)를 발표할 무렵,

짐 모리슨은 주술적인 의미에서 또 다른 자아를 창조하여 스스로를 리저드 왕이라 칭했다.

새 앨범 표지 안에는 모리슨의 시 〈리저드 왕을 찬양하며 The Celebration of the Lizard King〉가 새겨졌다. 

공연에서 그는 점점 더 격렬한 몸짓을 구사했는데, 1969년 마이애미에서의 공연 때는 외설적인 노출 때문에 구속되기도 했다.

그에 대한 기소는 기각되었으나 이 사건으로 모리슨은 쇠약해졌고, 부분적으로 알코올 중독이

원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모리슨이 시 창작에서 위안을 얻게 되면서(그가 지은 시 중 일부는 출판되었다), 도어스의 공연은 점차 줄어들었다. 도어스는 블루스 곡인 

〈모리슨 호텔 Morrison Hotel 〉(1970)로 다시 한번 명성을 쌓았으나, 6집 앨범 〈L. A 여성 L. A. Woman〉 (1971)을 발표한 후 모리슨은 

파리로 가 칩거 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문학 경력을 쌓고 싶어했으나 1971년 심장마비로 27세의 나이에 죽었다.

모리슨이 없는 상태에서 도어스는 해체되기 전까지 2개의 특색 없는 앨범을 냈다.

이들은 1978년에 잠시 모여 모리슨이 죽기 전에 녹음한 시에 배경 음악을 삽입한

〈미국인 기도자 An American Prayer〉란 앨범을 냈다. 이외에도 맨자렉은 펑크 밴드 'X'의 앨범을 제작하기도 했다.

모리슨은 죽고 나서도 여러 세대에 걸쳐 젊은이의 우상이었다.

이기 팝(Iggy Pop), 에코 앤드 더 버니맨(Echo and the Bunnymen)의 이안 매컬럭(Ian McCulloch), 펄 잼(Pearl Jam)의 에디 베더(Eddie 

Vedder) 등 후대의 음악가에 영향을 끼친 명사가 되었다. 도어스의 앨범은 지금까지 수백만 장이 팔렸다. 1991년 올리버 스톤 감독이 

제작한 영화 〈더 도어스 The Doors〉는 비판과 동시에 성공을 거두었다.

 1993년 도어스는 록 앤 롤 명예의 전당에 등록되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을지언정, 그럼에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노래들이 종종 있다. “The End”가 바로 그중 하나일 것이다. 이 곡은 길이로 보나 

범위로 보나 어마어마하며, 대중음악계가 극단의 한계 탐험에 한참 빠져들기 시작했을 무렵인 1967년 기준으로 볼 때조차 한계 극복적이고 금기 타파적인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작정한 것은 아니다. “The End”는 사실, 수태 당시만 해도 도어즈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던 “Light My Fire” 같은 3분 길이의 

일반 팝송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약물에 흠뻑 젖은 채 계속된 로스앤젤레스 공연들을 거치며 한 대 맞은 듯 제대로 모양이 변했다. 

그들의 데뷔 앨범의 마지막 트랙으로 간택될 시기에 이르러 이 곡은 무려 12분의 육중한 거구가 되어 있었고, 


그 속에는 사악한 기운의 오르간, 인도풍 기타 드론, 빽빽하지 않은 재즈 드러밍이 논란의 여지를 남기는 숨은 문맥상 의미를 담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 

말들의 격류와 병치되어 있었다.

이것은 전대미문의 음악이었고 블랙 사바스부터 컬트, 조이 디비전까지 수많은 밴드에게 영감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모리슨이 땀 냄새 나는 자기 풍자 행위에 빠지게 된 후 도어즈는 감각이 떨어지는 밴드로 전락한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훌륭하지만 

좀 과도했던 ‘Apocalypse Now’에 “The End”를 빌려 활용한 후부터 이 곡은 오만함의 기준점같이 여겨지게 되었고, 자파부터 너바나까지 유행의 선두를 

달리는 젊은이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해버렸다. 그러나 이 모든 걸 막론하고, “The End”는 오지만디아스적 업적으로 남아 있다. 

온몸이 전율하는 고도의 예술적 기교와 야심찬 광휘를 자랑하는 업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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